큰사진보기 ▲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본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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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으로 돌아온 강만길은 1952년에 학제 변경으로 마산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졸업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웠기에 강만길은 고향 근처 초등학교의 임시 교원을 지망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뜻하지 않은 행운이 그에게 찾아왔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서울대나 연세대 등 다른 대학은 거의 다 부산에 있었는데 고려대만이 유독 대구에 내려와 있었어요. 고려대를 택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진학할 형편이 못 되어서 주변 농촌에 가서 소학교 선생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을 접수시키러 갔다가 고려대 원서를 사 가지고 와 권하시기에 시험이나 쳐보자 했는데 합격이 되었어요. (주석 1)

이와 관련해 그는 뒷날 역사의 우연성과 필연성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했다.
“평생 역사 공부를 하면서 항상 헤매게 되는 문제가 역사의 우연성과 필연성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담임선생님의 호의가 아니었으면, 모르긴 해도 고향 근처 초등학교 선생으로 안존한 평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주석 2)

‘우연한 계기’로 고려대학생이 되고, 대구의 임시 교사에서 강의를 받았다. 강만길은 중학교 때부터 흥미를 느꼈던 사학과를 지망했다. 이때가 1952년이다.

대학에 들어올 적에는 어떤 선생님들이 계신지도 몰랐어요. 입학해서는 대구 가교사에서 강의를 받았는데, 국사를 강의하시는 분은 신석호 선생님 한 분밖에 안 계셨습니다. 전임으로는 김정학 선생님이 계셨던 것 같은데 대구에서는 강의를 못 받았고, 동양사에 정재각 선생님, 서양사에 김학엽 선생님, 김성식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중학교 시절에 느끼고 있던 국사에 대한 흥미가 더하여 비교적 강의를 재미있게 열심히 들었습니다. 신석호 선생님은 부산에 피난을 와 계시면서 대구까지 왔다 갔다 하며 강의를 하셨는데, 특히 그분 강의가 재미있었습니다. 특별한 경향성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마치 사랑방 노인네들 말씀처럼 아주 구수하게 잘하셨어요. 그분은 흔히 말하는 실증주의적 역사 방법으로 주로 당쟁사와 조선왕조사를 강의하셨는데, 역사적 사실을 쭉 얘기해 주면 책이 없으니까 노트에 그대로 받아 적는 식으로 강의를 받았습니다. (주석 3)

강만길은 신석호로부터 여러 차례 은혜를 입었다. 이런 인연으로 뒷날 <신석호 선생님이 살아오신 길>을 쓰기도 했다. 학술지에 발표한 이 글에서 신석호를 “촌로처럼 소박하고 인정미 짙은 인간상” 등으로 표현하고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사를 전공한 제1회 졸업생이면서 일본인 지도교수의 알선에 의해 조선사편수회에서 학문연구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 지배 목적에 의해 편찬된 조선총독부판 편년체 <조선사> 편찬에 관여하게 되었고….” (주석 4)

친일사학자로 알려진 신석호는 “1929년 4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거쳐 1930년 5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되었으며 1937년 중추원 조사과 속을 겸했다. 1937년 9월 수사관으로 승진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근무” (주석 5)했다.

<조선사> 편찬 등을 통해 식민사학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 6월 ‘조선 사료의 수집, 편찬 및 조선사의 편수를 담당’할 목적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조선총독부 직속 기관이었다.

2005년에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진상규명의 일환으로 특별법에 따라 설립된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될 때 학계 일각에서는 강만길과 신석호의 관계를 들어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석호로부터 사적으로 시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공적으로는 일탈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실로 고3 때 담임선생님의 호의로 대학 진학을 할 수 있었다 해도 사학과를 지망해 신석호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학문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 대학에서 신석호 선생님을 만났다 해도 그분이 제자들의 전공 분야를 자신의 전공인 조선왕조의 당쟁사 언저리에 한정하게 했다면 아마 학문을 계속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한다. (주석 6)

6·25 전쟁은 1955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단 멈추었다. 고려대학교가 서울로 돌아가게 되면서 강만길도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관심 분야인 역사학을 더 체계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체제가 경화되어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나 <조선봉건사회경제사>도 몰래 읽을 수밖에 없고, 그 외의 사회과학 서적은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도교수이신 신석호 선생님께 의논을 했더니, 조선시대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고대사를 포기하고 당시는 근대사로 불린 조선시대를 연구하게 됐습니다. (…)

노비제를 공부하고자 했을 때도 피지배계층의 생활사를 밝혀야겠다는 생각에서였는데, 조선시대를 하더라도 피지배층, 하층계급에 관한 연구를 해 보고 싶었어요. 지금은 어디 가 버렸는지 없어졌지만 학부 졸업논문으로 조선 초기의 상인을 다루었어요. 석사논문에서는 장인, 공장(工匠) 문제를 다루었고, 그다음에 다시 백정 문제를 다루게 되었는데 아마 뚜렷한 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당시의 학문 분위기가 정치사나 제도사 중심이어서 이에 대한 보완의 방안으로 피지배층 사회의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주석 7)

주석
1>역사문제연구소, 앞의 책, 201쪽.
2> <역사가의 시간>, 125쪽.
3>위의 책, 201~202쪽.
4>백산학회, <백산학보>, 70호, 백산학회, 2004.
5>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편, <신석호>, <친일인명사전(2)>, 민족문제연구소, 2009, 377쪽.
6> <역사가의 시간>, 125쪽.
7>역사문제연구소, 앞의 책, 203~20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