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이 지난 2022년 5월 26일 서울 용산구 인권연대에서 와 만나 윤석열 정권 출범에 대한 우려와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이 정권을 빼앗긴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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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홍세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아이들은 그분이 누구냐며 서로 두리번거렸다. 학교 선생님 중 그런 분이 계셨냐며 수군거렸다. 교직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내 삶의 푯대로 여겨온 그분과의 일화를 소개하며 수업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는데, 교실 분위기가 순간 데면데면해지고 말았다.

그의 이름을 아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어제오늘 뉴스에서 부고 소식을 잠깐 본 적 있다는 게 전부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생각의 좌표> 등 그가 남긴 숱한 베스트셀러 역시 읽어봤다는 아이가 없었다.

내심 서운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가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힌 계기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에 대해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는 ‘듣보(듣도 보도 못하다)’일 뿐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민족해방’과 ‘전선’ 등은 낯설다 못해 금기시하는 단어다. 하물며 ‘남조선’임에랴.

아이들은 3선 개헌과 전태일의 분신 사망, 인혁당 재건위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유신 독재정권의 숱한 만행에 대해 배워 잘 알고 있지만, 정작 그의 험난했던 삶과 연결 짓지 못했다. 그저 ‘역사’로 기억할 뿐, 당시 사람들의 ‘삶’이 배제돼서다. 아이들은 그 ‘역사’를 수많은 ‘홍세화’들이 써 내려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홍세화 선생님이 일깨워주신 것이다.”

교내 여러 행사가 겹쳐 학급별로 진도가 들쭉날쭉해 조정도 할 겸, 내친김에 홍세화를 주제로 한 계기 수업을 진행했다. 개인적인 인연과 오래전 학교에 초대해 선배들과 만남을 가진 이야기 등을 들려주며 아이들과 함께 그를 추모하기로 했다. 마치 그의 호인 양 ‘귀감’이라는 두 글자를 칠판에 적으니 왠지 울컥했다.

그의 생애를 파란만장했던 우리 현대사에 입혀 소개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가 내게 미친 영향을 고백하듯 들려주는 게 더 나을 성싶었다. 교사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통해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걸 아이들도 시나브로 깨닫기를 바랐다. 기실 이를 처음 깨닫게 해준 분이 홍세화 선생님이시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2008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교직 10년 차,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한 대학의 강연장에서 그를 직접 뵈었다. 책을 통해 떠올린 그와 직접 대면한 그의 모습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았다. 한 사람의 말과 글, 심지어 동작 하나까지도 일치할 수 있다는,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피 끓듯 올곧고 치열했으며, 수줍은 듯 순수하고 겸손했다.

강의가 끝나자 맨 먼저 손을 들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식순에는 질의응답 시간이었지만, 다짜고짜 교직 생활에 지친 나를 위로해달라며 어린아이 투정 부리듯 떼를 썼다. 당신이 펴낸 모든 책을 빠짐없이 사서 읽은 애독자로서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는 되바라진 이야기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당시 그로부터 즉석에서 건네받은 답변이다. 순간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가 건넨 위로는 성찰과 다짐을 일깨우는 죽비였고,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생애에 대한 호기심마저 자극했다. 몇 해 전 이탈리아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부러 그의 자취를 따라 반파시즘의 성지, 리보르노를 찾아가기도 했다.

몇 해 뒤 그에게 강연 요청을 드렸다. 학교 도서관 업무를 배정받은 직후, 명사 초청 강연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던 때였다. 지방의 고등학생들에게 저명한 인사를 모시고 인문학의 향기를 누리게 한다는 취지를 내걸었다. 내심 입시 공부에 찌든 아이들에게 잠시나마 숨통을 틔워주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는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줄곧 서서 칠판에 열심히 판서해가며 그의 사상과 신념을 담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도서관에 모인 40여 명의 아이들과 교사들 앞에서 ‘주인과 노예적 삶’, ‘글쓰기와 토론의 중요성’ 등을 주제로 그의 강의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아이들이었지만, 강의가 시작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고 강의가 한창인데 돌아다니며 그들을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강의가 끝난 뒤, 부러 아이들을 책망하며 그에게 송구함을 전했는데, 그는 되레 자신의 부족함 탓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무엇이든 아이들의 탓으로 돌리게 되면, 더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건 부모와 교사 스스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입니다.”

또 한 번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세계 최장의 학습 노동을 강제하는 학벌 구조를 문제 삼아야지, 밤늦도록 공부하느라 잠을 못 잔 아이들을 나무랄 순 없다는 거다. 온존한 학벌 구조를 혁파하는 데 더욱 힘써야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었다며, 되레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다독였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면서도, 애꿎은 아이들만 탓하는 기성세대의 무책임한 모습을 에둘러 꼬집은 것이다. 아이들의 그릇된 행동을 문제 삼으려면, 기성세대의 성찰과 실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모와 교사가 지녀야 할 솔선수범의 교육적 책무를 은연중에 강조하는 일갈이었다.

그는 떠났어도, 가르침은 남았다

그는 강의 내내 아이들에게는 관대했고, 교사에게는 가혹했다. 민주적이지 않은 학교에서 민주시민을 육성한다는 건 난센스라고 질타하며, 교사들의 인문학적 소양과 인식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곳이어야 함을 줄곧 강조했다.

“행동과 실천으로 증명되지 않은 도덕적 우월감은 위선일뿐더러 도덕의 개념을 타락시키는 죄악이다.”

살아생전 그가 책과 강연과 대화를 통해 내게 건넨 귀한 가르침이다. 그와의 인연이 맺어진 뒤 책상 앞에 붙여놓고 좌우명 삼고 있다. 비루한 일상에 치여 이따금 나약해질 때마다 곱씹으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도덕성은 교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 중의 으뜸이며, 도덕성이 결여된 교사는 결코 유능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이 여전히 귓가에 생생하다.
큰사진보기 ▲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에서 한 시민이 18일 타계한 고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을 조문하고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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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르침에 누가 될까 싶어 부동산이나 주식 정보 따위엔 아예 관심을 끊었다. 그럴 시간에 교재 연구를 하고, 아이들을 한 번 더 만나는 게 교사로서 올바른 행동일 테다. 그 흔한 로또 한 번 사본 적도 없다. 한낱 요행을 바라는 건 노력의 가치를 조롱하는 반교육적 행태로 여기기 때문이다.

쉽진 않았지만, 고기도 끊고 육류 위주의 학교 급식 대신 도시락을 싼다. 수업 때 공장식 축산의 폐해와 환경 오염의 심각성을 강조해놓고선 고기를 즐긴다는 게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져서다. 종이컵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5층 이내면 승강기를 타지 않는다는 나름의 규칙도 세웠다. 최근엔 일주일에 한 번은 자전거로 출퇴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소한 실천일 뿐이지만, 이밖엔 그를 향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는 떠났어도 그의 가르침은 남았다. 수업을 갈무리하며 아이들에게 그가 쓴 <생각의 좌표>를 추천했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는지’ 자문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시민으로 성숙해가는 첫걸음이라 여겨서다.

사족. 이 글을 쓰는 도중 카톡이 울려댔다. 홍세화 선생님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는 제자들이 보낸 문자다. 도서관의 명사 초청 강연 때 함께했던 아이들이다. 언뜻 보니, 카톡 상태 메시지에 ‘홍세화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는 추모글을 올려놓은 제자들이 여럿이다. 또 한 번 울컥했다. 삼가 나의 영원한 스승, 홍세화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