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뉴진스의 ‘Ditto’ 뮤비에는 뉴진스 팬을 표상하는 반희수란 인물이 등장한다. 반희수는 교정을 거닐며 뉴진스 멤버들을 캠코더에 담고 틀어 보기도 하며 현실인 듯 환상인 듯 멤버들과 친밀한 교감을 나눈다. 영화평론가 김병규의 지적대로 반희수는 기록자이자 회고의 주체이며 다양한 정체성으로 소묘되어 있지만(‘반희수는 어디에 남아 있을까’, 씨네21), 반희수는 오늘날 케이팝 팬덤의 자화상을 담기엔 지나치게 아날로그적이고 지나치게 통념적이다. MV를 처음 볼 때 다소 놀랐을 정도로 반희수엔 케이팝 ‘오타쿠’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의 이미지가 날 것 그대로 비껴 있다. 헛것의 관계성을 쫓고, 골방에 웅크린 채 아이돌을 맞이하는 히키코모리. 이것은 이미지로서의 오타쿠일 뿐 개념으로서의 오타쿠는 아니다.

팬덤과 오타쿠의 차이

알다시피 오타쿠는 일본에서 온 말이다. ‘만화·애니메이션·게임 등 서브컬처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총칭’(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으로 통한다. 오타쿠는 한국에선 ‘덕후’란 말로 어감이 현지화되어 쓰이고, 연예인이나 특정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 쓰이는 경우도 많지만, 엄밀히 따지면 팬덤과 오타쿠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내 언어 감각으로는 단일한 대상에 관해서는 팬이란 말이 어울리고, 자기 내부에 범주를 품고 있는 대상에는 오타쿠란 말을 붙이는 게 자연스럽다. 예컨대, 자신이 기르는 앵무새 한 마리에 유대감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조류’라는 척추동물을 파고들며 무수한 종의 이름과 차이를 외우는 사람이 ‘새덕후’라고 불릴만하다. 즉, 팬덤은 애정과 지지의 감정으로 구성되지만, 오타쿠는 그를 넘어선 탐구심과 전문성에 대한 몰두로 구성되며, 그것을 받아 안아 주는 계통화된 다수의 대상과 데이터가 필요하다.

오타쿠에 관한 부정적 인식들, 사회성 부재와 자폐적 성향은 이렇듯 특정 관심사에 침잠하는 자아의 뒷면이며, 뒤집어 본다면 오타쿠는 사회적 관계라는 체계와 별개로 데이터와 컬렉션으로 조직된 취미 세계의 또 다른 체계를 귀속 집단 삼아 투신한 이들이다. 이들은 특정 대상에 대한 애착감정보다 그 대상을 아우르는 체계에 천착하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그렇기에 애호 대상에 관해 팬덤보다 좀 더 자의식적이고 메타적인 의식을 갖추기 마련이다.

‘오타쿠 문화에 대한 고찰’이란 논문(송영민, 강준수)에서도 오타쿠의 한 특성이 전문성이며, 특정 대상에 애정과 호감을 품으면 관련된 모든 정보와 관련 상품을 축적하는 것이 이들의 소비패턴이라고 설명된다. 다르게 표현하면, 취미 대상에 대한 천착과 그에 관한 데이터(지식/정보, 피규어 등 물질로 이뤄진 데이터)의 수집과 소비가 오타쿠적 행위 양식이다. 문화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는 90년대 일본 오타쿠계에서 ‘캐릭터 모에’(모에: 서브컬처 캐릭터 또는 연예인 등을 향한 허구적 욕망을 의미)란 현상이 나타났으며, 개별 작품이나 캐릭터를 넘어 그 심층에 있는 오타쿠계 문화 전체의 데이터베이스가 소비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캐릭터가 아닌 캐릭터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의 조합이 소비 대상이 되었고 거기서 캐릭터 비즈니스의 만화경이 도래한 것이다.

케이팝적 오타쿠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케이팝과 오타쿠의 관계, ‘케이팝적 오타쿠’가 성립할 수 있는지 논해야 한다면 질문은 간단하다. 실존하는 인물이 캐릭터인 산업, 아이돌이란 ‘단일한 대상’을 향한 애착감정이 대명제이며, 그 캐릭터가 모에 요소로 분해 조립되기 어려운 산업에서 심층의 데이터베이스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러니까 어떻게 ‘팬덤’은 ‘오타쿠’가 될 수 있을까.

한 가지 대답은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케이팝의 텍스트화’다(☞SM과 하이브의 공통점, 케이팝 아이돌의 ‘세계관').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서사적 체계가 도입되며 아이돌 그룹 내부에 계통화된 지식/정보가 마련됐다. 그 외에도 춤, 노래, MV에 더해 자체 콘텐츠와 IP 사업으로 발전한 파생 콘텐츠가 다각화되며 소비할 수 있는 데이터의 범주가 늘어났다. 단순히 아이돌에 애착을 쏟아붓는 상태를 떠나 텍스트화된 대상에 대한 탐구와 분석, 수집에 천착하는 소비 양식이 나타난 것이다. 아이돌은 가장 뒤늦게 등장한 부류의 가수이지만, 케이팝이 태어난 지도 20년이 넘었다. 명실공히 역사라 부를 만한 시간이 퇴적되며, 그 안에 갖가지 가수와 사건과 콘셉트의 두께가 생겼고, 마치 건담 시리즈의 계보를 기록하듯이 가수를 세대별로 나누고 산재된 정보들을 연결하고 기록하는 지적 유희 행위도 향유되고 있다.

이러한 케이팝의 텍스트화, 계보화에 더해 ‘케이팝적 오타쿠’를 성립케 하는 요소는 아이돌 소비의 복수화다. ‘팬덤 3.0’의 저자 신윤희는 이른바 ‘3세대 팬덤’의 특징이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돌 기획과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소비자 행동주의라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는 아이돌이란 텍스트 내부에 팬덤이 참여하여 메울 수 있는 공백이 중요하고 그를 통해 아이돌과의 유대감, 산업을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효능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팬데믹과 프로듀스 시리즈 조작 사태 이후 케이팝의 흐름은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의 쇠락과 소비 참여 대상의 복수화가 됐다. 이제 팬덤은 기획이 완성되지 않은 단계에서부터 아이돌과 동행하며 서사를 함께 만들어 간다기보다, 이미 기획된 형식으로 주어지는 서사와 세계관을 소비한다. 그것들의 보편화를 타고 다양한 그룹의 기획을 두루 맛보고 취사선택하는 상태로 나아갔다. 이는 특히 걸그룹 신의 동시다발적 신인 그룹 론칭과 맞물려, 복수의 그룹을 팔로우하는 ‘잡덕’이란 팬덤 양식으로 현상화되었다.

스페이스 오디티의 김홍기 대표는 이 현상을 증언하며 ‘멀티 스탠’, 케이팝의 탈중앙화라고 표현한다(‘임영웅 팬들은 열심인 ‘총공’ 젊은 세대는 왜 안 할까?’, 티타임즈 TV) ‘잡덕’은 이미 케이팝 글로벌 팬덤 사이에서는 보편적인 습속이었고, 아이돌 산업의 태동 이후 그 나름의 팬덤 문화가 전승되던 한국에서도 보편적인 현상이 된 것이다. 아이돌 팬덤은 특정 대상에 대한 강렬한 애착감정으로 조직된다. 그래서 개별 그룹의 팬은 있어도 장르 팬이란 개념이 자리 잡기 힘들었다면, 개별 대상을 향한 몰입에서 다소 빠져나와 복수의 대상이 이루는 체계를 메타적으로 소비하는 경향, 케이팝이란 장르의 팬덤이 되어 가는 것이다.

바로 이런 다양한 그룹의 기획 요소가 데이터베이스가 되어서 소비자가 그것들을 능동적으로 연결 짓고 옮겨 다니며 개별 아이돌이나 콘텐츠가 아닌 그 심층에 있는 케이팝계 문화 전체가 천착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케이팝 산업에서 ‘팬덤’이 ‘오타쿠’가 되는 전환이다. 따라서 ‘4세대 팬덤’이 ‘잡덕’이 되었다는 건 단순히 대중성이 중요해졌다거나, 코어 팬덤 대신 라이트 팬덤이 우세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진실은 반대다. 그런 방식의 ‘얕은’ 팬덤 문화로 후퇴한 것이 아니다. 팬덤 산업의 역사와 시스템이 집적되면서 소비자의 존재 양식 역시 고도화되고 정체성의 전환이 단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뉴진스와 케이팝적 오타쿠

뉴진스가 ‘4세대’ 케이팝의 아이콘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면, 이러한 문화산업적 전환을 집약하는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뉴진스의 성공이 기획의 힘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뉴진스가 기획요소의 데이터베이스를 색다르게 선별하고 성공적으로 조합한 사례라는 뜻이다. 일례로 이 그룹의 기획노선은 케이팝 계보에 축적된 90년대, 00년대 걸그룹의 이미지를 소환하며 현세대 메인스트림 콘셉트와 차별화를 주고 레트로라 불리는 사회적 유행과의 융합을 도모한 것이다. 뉴진스가 특이한 건 기획자 민희진 대표의 존재감이 멤버들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점이다. 이건 멤버들을 향한 애착감정을 넘어 기획 요소의 총체로서 뉴진스가 소비되고 있으며 민희진은 그 기획을 대표하는 존재로 호명되고 있다는 뜻이다.

생각하면, 케이팝 업계에서 스타 작곡가, 혹은 안무가가 각광받은 적은 있어도 기획자가 이토록 전면에서 호명된 적은 없었다. 이수만과 양현석은 기획자라기보다 기획사 오너로서 아이돌 뒤편에 버티고 있던 존재이며 방시혁도 비슷하다. 박진영은 오너나 기획자 이전에 작곡가이며 그 자신의 아티스트 자의식에 도취하는 존재였다. 이건 아이돌의 성공 요인이 춤과 노래처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심플한 요소를 넘어 세분화된 콘텐츠와 콘셉트의 종합으로 다양하고 복잡해졌다는 증거다. SM 시절부터 민희진 대표를 추종하는 케이팝 ‘고인 물’들이 존재했던 것도 이들이 민희진 자체를 사모했다기보다 민희진이 남긴 작업물들에 천착하며 자신이 그 가치를 알아본다는 오타쿠적 자의식을 채운 것에 가깝다.

뉴진스는 내가 ‘케이팝적 리얼리즘’(☞이수만의 '광야'와 케이팝의 미래)이라 명명한 케이팝의 캐릭터 산업화란 흐름에서도 산업 정세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독특한 행보를 가고 있다. IP 사업을 통한 파생상품의 다각화가 지상 과제가 되어 그 수단으로 세계관 장착이 필수가 된 시대에, 세계관이란 개념을 우회해 버리고 서사물을 통해 아이돌을 캐릭터화하지도 않았다. 대신 완전히 만화 애니메이션화된 토끼 캐릭터를 그룹을 표상하는 독자적 이미지로 만들어 디자인 친화력을 높이고 파생상품 콜라보를 자유자재로 추진하고 있다. 뉴진스는 세계관이란 ‘커다란 이야기’가 아닌, 그 세계관마저 기획 요소로 아우르게 된 데이터베이스의 ‘커다란 비이야기’에 기반을 둔 그룹이며, 오늘날 이야기와 분리된 채 소비되는 캐릭터의 존재 양식을 체현하고 있다.

그렇기에 뉴진스와 민희진 대표에 관해서는 저 모든 요소를 기획자 1인에게 귀속시키며 작가에 관한 낡은 신화를 소환하거나, 뉴진스의 성공 비결은 결국 ‘좋은 음악’이라며 아이돌의 정체성을 가수로 단순화하는 낡은 관념으로 퇴행해서는 안 된다. 그 저변에 깔린 시대상은 물론, 케이팝 산업과 팬덤 문화의 난숙을 알아볼 때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케이팝은 ‘오타쿠 계’의 정의에 미달하는 환경에서 시작됐지만, 팬덤 산업으로서 고도화되고 점점 더 서브컬처 마켓과 닮아갔다. 관용어로서의 오타쿠 혹은 ‘덕후’가 아닌, 개념으로서의 오타쿠들을 품을 수 있는 환경으로 왔다. 물론 이런 전환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오타쿠라 불릴 만한 소비자들은 과거에도 있었다. 어떤 양적인 변화가 축적되며 일어난 전환으로 봐야 한다.

아이돌 소비 참여의 복수화, 케이팝이란 문화 전체에 대한 천착이라는 키워드를 케이팝적 오타쿠라는 조어로 표현해 봤지만, 이것이 꼭 사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환경인지는 알 수 없다. 결국 안정적인 매출은 열성적이고 두터운 코어 소비자에게서 나온다. 무엇보다 케이팝의 기본이자 필수 기획 요소는 아이돌이다. 실존하는 인간은 모에 요소로 분해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이 명제에 케이팝의 과거와 미래, 이윤과 윤리에 관한 테마가 가닥가닥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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