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원 : 귀화한 후에 나의 첫 선거는 2017년 5월 대선이었다. 내 인생 최초의 선거이기도 했다. 참정권을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다는 설레임과 함께 투표소로 향했다. 그때는 외국인이 많은 이태원에 살았기 때문에 투표소에 들어간 나를 잘못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한 담당자가 나의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너무 놀라서 허둥대며 안내를 했던 웃긴 에피소드도 기억난다.

주식 : 내 인생의 첫 투표라 너무 서툴렀다. 투표용지를 받아 부스에 들어가긴 했으나 어쩔 줄 몰랐다. 투표소에 가기 전에 집에서 인터넷으로 절차를 다 미리 찾아봤지만 막상 투표용지를 손에 들어 보니 지금 이 순간의 진지함이 느껴져서 좀 긴장하게 됐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내 소중한 한 표가 무효 처리가 될까 봐 투표용지를 뚫어져라 봤다. 도장을 찍을 때 정확한 각도가 있나? 다 찍고 투표용지를 그대로 투표함에 넣어야 되나, 아니면 반으로 접어서 넣어야 되나? 투표했다고 인증샷을 남기고 싶었지만 투표소에서는 사진을 절대 찍으면 안 된다고 알고 있었다. 인터넷을 보니 사람들이 자기 손에 도장을 찍고 투표소에서 나와서 밖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너무 긴장돼서 손에 도장을 못 찍었다. 너무 아쉬웠다.

허둥대면서도 소속감 충만했던 한국에서의 첫 선거

저녁에 친구를 만나 치맥 하면서 개표 방송을 봤다. 예전에도 선거 결과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남달랐다. 외부인으로 관찰하는 것과 사회 일원으로 관찰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수백만 명이 던진 표 중에서 내 표도 있다는 생각은 왠지 용기와 소속감을 줬다. 책에서만 보던 그 ‘국민 주권’이 무엇인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 이후 있었던 선거에는 내가 지지하는 후보들이 당선되기도 하고 낙선되기도 했지만 매번 그 느낌이 좋았다. 러시아에서는 그런 느낌이 안 나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으로는 선거를 한 번도 못 해 봤다. 러시아에 살았을 때는 아직 미성년자라서 투표권이 없었고 한국에 온 다음에는 선거날에 자꾸 핑계가 생겨서 러시아 대사관으로 못 갔다. 한국으로 귀화해서 선거에 몇 번 참여해 봤더니 왜 굳이 러시아 대사관에 가서 투표할 생각을 안 했는지 슬슬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후보 선택폭이 없기도 하고 투표를 해 봤자 어차피 결과를 조작할 것이라는 그 무기력함, 그것이 이유였다. 선거의 핵심적인 의미가 전혀 안 보였던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푸틴의 위치가 굳어지면서 나라는 서서히 독재 체제로 변하고 있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 상황이 매우 많이 악화되었고 이제는 선거가 문제가 아니게 됐다. 정직하고 투명한 선거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에 선거가 다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24년 3월 러시아 대선 결과에 대해 한국인들로부터 질문을 많이 받았다. 러시아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킨 대통령을 왜 지지하냐, 인기가 높은 이유가 무엇이냐 등이었다. 득표율 숫자가 전혀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를 늘 하지만 납득시키기 쉽지 않다. 그나마 군사독재 시대를 기억하는 세대는 알아듣는 눈치지만 한국 민주화 이후에 태어나서 자란 세대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뽑는 것이 아니라 충성도 재확인 용도의 러시아 선거

방송 인터뷰에서는 현재 러시아 체제에서 ‘선거’라고 하기보다 ‘충성도 재확인 행사’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말한다.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푸틴을 재임시키기 위한 행사이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올바른’ 투표를 유도한다는목적으로 투표부스 앞에 자리잡고 지키는 ‘투표 도우미’, 투표용지 사진을 촬영해서상사에게 보고하도록 강요하는 것, 투표소 관리인들이 새벽 시간에 몰래 사망자 이름의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투하하는 행위, 투표 결과 보고서 조작, 투표 관찰인들의 물리적 폭력 등이 횡행하는 선거를 정직하고 투명한 선거라고 부를 수 없다. 개표 방송도 없고, 선관위원장이 선거 다음날에 정부가 통제하는 방송국을 통해 단순히 결과 숫자만을 발표하면서 당선인을 선언하는 것이 러시아의 선거 풍경이다. 지방별, 지역구별 데이터를 구하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병합한 지역에서도 선거를 치렀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인지 그 지역의 투표 결과 지표를 공개했다. 전쟁 중인 지역에서, 선거날을 포함해서 매일 수십, 수백여 명의 사망자가 나오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다른 나라의 땅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유권자 명단도 없는 상황에서, 몇 지역구에서 100% 투표율에 100% 푸틴 득표율을 통계자료에서 볼 수 있다. 수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나올 수 없는 숫자다. 이런 ‘답정너’ 선거에서 발표 숫자를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번 선거 결과를 분석하면서 한 러시아 진보 언론에서 웃픈 농담까지 했다. 2000년 대선부터 지금까지 푸틴의 득표율을 살펴 보면 선거마다 대략 12%씩 올라가는 추이가 보인다. 이번에는 87% 정도였으니 2030년 대선에서는 드디어 전국 득표율 100%에 도달하겠다는 예언이었다.

정부의 선동 나팔수 역할을 하는 방송만 남겨 두고 반대 목소리를 내는 모든 방송사 전면 폐지, 인터넷 검열, 주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뉴스 기관 인터넷 페이지 차단, 야권 주요 인물 암살과 투옥, 방송을 통한 전 사회적 폭력과 혐오 분위기 조성… 인터넷을 잘 안 쓰는 기성세대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에 너무 헷갈려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도 모른 채 입 귀 다 막고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평범한 생활만을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공정한 선거가 그리 큰 문제도 아니다.

한국이 지금처럼 강요와 위협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이 자기 의견을 겁 없이표하고, 이런 투표의 결과로 반대 세력이 집권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멀고 힘든 길을 걸어 왔는지 알고 있다. 이런 한국 선거에서 투표할 때마다 과연 러시아는 이런 선거를 언제쯤 치를 수 있을지, 과연 그런 날이 올 수나 있는 건지, 아득한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