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본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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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은 ‘학운(學運)’이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타고난 재질도 있었으나 스승 신석호의 배려에 힘입은 바도 컸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 자리를 잡으면서 고려대학과 단국대학,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에 출강하고 <사학연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학문 생활 지망자들이 전임교수가 되기 전에 대부분 어렵게 버티던 시기를 그는 비교적 수월하게 지낼 수 있었다.

1966년 봄, 신석호가 성균관대학의 학장이 되면서 숭실대학교의 최영희 교수가 국편의 편찬과장이 되고 강만길은 고려대학 사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이 역시 신석호가 추천했다. 일부 교수들이 반대를 제기하자 바로 전임 발령을 내지 않고 한 학기 강의를 시킨 뒤에 별 문제가 없으면 채용하기로 양해되었다.

강만길에게는 행운이었다. 고대 사학과에는 선배 두 사람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고, 나이도 다른 이들에 비해 아직 젊은 편이었다. 그는 일종의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고 모교 졸업생으로서는 처음으로 전임이 되었다. 그래서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국편에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강의 준비에 나섰다. 그동안 음지에서 밤잠을 줄여 가며 매달렸던 사학의 줄기를 다시 꿰고, 언저리에 맴돌았던 자본주의 맹아 문제 등 역사학계의 이슈를 집중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1970년 3월 하순에 교환교수의 자격으로 6개월 동안 일본에 체류했다. 평양에서 발행하는 <역사과학> 등을 통해서 처음으로 북한의 역사학 연구 현황을 접하는가 하면 뜻하지 않은 과외의 소득을 얻었다. 헌책방의 한 서가에서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노래> 일본어 번역본을 발견한 것이다.

도오쿄오 시대의 지리 중 제일 먼저 익힌 것이 칸다(柛田)라는 헌책방 거리였으니까 아마 4월 초순 어느 날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전에 우연히 읽었던 <피압박민족의 지식인>이라는 책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으나 구할 수 없어 못 읽었던 미국 여기자 님 웨일스가 쓴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라는 부제가 붙은 <아리랑의 노래> 일본어판을 헌책방의 한쪽 서가에서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샀다. 숙소에 돌아와서 예사로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곧 책 속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만사를 잊고 밤새워 읽었음은 물론 다음 날도 밖에 나가지 않고 연달아 두 번이나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주석 1)

당시 그는 조선 후기 상업자본 발달과 그것의 수공업 경영, 즉 ‘상인 매뉴팩처’에 대해 연구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아리랑의 노래> 뒷부분에 나오는 1930년대 후반기 이후 좌우익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그의 연구의 지평은 훨씬 넓어진다.

이 책을 통해 나의 식민지 시대 민족해방운동사 인식에 몇 가지 구체적인 변화가 나타났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그것을 정리해 보면, 첫째는 일제 식민지 시대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익 전선에 가장 역사성의 실체가 한층 더 분명해진 점이며, 둘째는 1930년대 이후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일어난 좌우익전선 사이의 통일전선운동의 실체를 알게 된 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석 2)

그동안 한국 사회는 박정희의 멈출 줄 모르는 권력욕에 따라 3선 개헌 등 풍파가 거셌으나 강만길은 현실 문제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연구실에 파묻혀 지냈다. 7·4 남북공동선언이 선포되고 금방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는가 하면, 정보기관원들이 교내에 상주하면서 교수들의 동태를 살피는 등 1960년대 후반기와 1970년대 초반 한국 사회는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던 1월 어느 날 저녁 야간 교육대학원 강의를 하는 중인데 교무과 직원이 와서 자신도 이유를 모른다면서 바로 강의를 중단하고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무슨 변괴가 났구나 생각하면서 강의를 중단하고 교문을 나서다 보니 이미 탱크인지 장갑차인지가 교내에 들어왔고 무장 군인들이 교문에 배치되고 있었다. (주석 3)

권력에 마취된 박정희는 3선 개헌을 감행하여 3선 대통령이 된 지 1년 반 만에 다시 헌정 질서를 짓밟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앞서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 등 화해 제스처는 정치적 곡예였다. 박정희는 친위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유신(維新)을 내세웠다. 1868년에 일본 사무라이들이 했던 수법이었다.

1972년의 유신정변 전까지가 그에게 ‘학운’이 따랐던 시기라면 유신정변 후는 그에게 ‘비운’의 시기였다.

강만길은 비교적 온건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4·19 때도 시위에 나서지 않았고, 1964~65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투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1969년 3선개헌반대투쟁 시기에도 일부 교수들은 반대성명 등을 발표했지만 그는 여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신정변을 지켜보면서 역사학도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자로서, 더욱이 사학도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역사가 하룻밤 사이 총칼에 의해 감금당하는 데도 역사학계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민족분단 시대의 남녘 역사학계가 비록 반공주의적·반북주의적 역사인식에 절었다 해도 유신이란 반민주주의적 횡포에는 그래도 반응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기야 일제강점기에도 강점 그 자체에는 무관심했던 것이 우리 역사학계여서 유신의 반역사성을 외면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얼마 전에는 정략적 한일협정을 반대한 역사학계가 아니던가….

왜 무엇 때문에 역사를 연구하고 또 가르치는가. 역사학이 아카데미즘이란 이름으로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 무풍지대인 상아탑 안에서만 안존해도 제구실을 다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역사 전공자에게는 이런 의문이 밀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석 4)

지식인은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외적으로는 특수주의에 행동으로 대항한다.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사르트르는 그 ‘역할’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첫째, 대중계급 내에서 영원히 되풀이되어 나타날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일이다. 지식인은 모든 이데올로기를 폐기해 버리는 데 힘써야 한다.

둘째, 지배계급에 의해 주어진 자본으로서의 지식을 민중문화를 고양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이다.

셋째, 혜택 받지 못한 계층 안에서 실용지식, 전문가가 배출되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계층과 유기적 지식인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한다.

넷째, 지식인 고유의 목적(지식의 보편성, 사상의 자유, 진리)을 되찾아 인간의 미래를 전망해 보아야 한다.

다섯째, 눈앞의 당면과제를 넘어서 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목표를 보여 줌으로써 진행 중의 행동을 근본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끝으로, 불의한 권력에 대항하여 대중이 추구하는 역사적 목표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지식인은 고독하다. 중간 계급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지식인의 고독은 숙명적이다. 지배층에서는 공허한 말로 권력을 비난하여 국민을 선동한다고 배척하고, 피지배층에서는 지배층의 앞잡이나 공범자라고 멀리한다.

그래서 권력 계급으로부터 추방되고, 피지배 계급으로부터는 의심을 받으면서 중간 계급을 형성한다. 중간적 위치에서 근원적인 목적, 다시 말해서 인간해방, 인권의 보편화,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한다. (주석 5)

주석
1>강만길, <취조실의 역사선생>, <역사를 위하여>(강만길 저작집 10), 창비, 2018, 40쪽.
2> 위와 같음.
3> <역사가의 시간>, 186쪽.
4>위의 책, 186~187쪽.
5>김삼웅, <다시 지식인의 역할을 찾는다>, <책과 인생>, 2024년 4월호, 범우사.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