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주식/주식ai : 재능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확장하는 뮤지션이 있는가 하면 가끔씩 단 하나의 곡 또는 앨범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일궈내는 경우도 없지 않다. 뭐랄까, 한순간에 음악을 포함한 스스로를 재발명하는 예술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최근에도 이런 뮤지션을 하나 만났다. 싱어송라이터 유라다. 그가 지난여름에 발표한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는 가히 2023년 최고작 중 하나다.

재원 : 기실 조짐이 엿보이기는 했다. 이미 유라는 재즈 밴드 만동과 함께 발표한 〈이런 분위기는 기회다〉를 통해 자신의 음악 지향이 재즈로 완전히 돌아섰음을 들려줬던 바 있다. 한데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에서 그는 몇 걸음 더 나아간다. 요컨대 이것은 대중의 기호에 다가가려는 앨범이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새로운 대중을 창조하려는 야심으로 가득한 음악이다. 만약 음악에도 진보적이라는 수식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음악에 허락되어야 할 것이다.

나도 안다. 누군가는 현학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듣기에 좀 어렵다는 독후감도 몇 보인다. 그러나 단언할 수 있다. 이런 음악이, 이런 뮤지션이 존재하기에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이 끝내 죽지 않을 거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차트를 지배하고 있는 아이돌 음악을 좋아한다. 뉴진스와 아이브는 그중에서도 최고다. 그러나 한국 대중음악이 오로지 아이돌 기반 케이팝만으로 정의되는 것에 약간의 불만이 든다. 만약 당신도 그렇다면 이런 음악을 들어야 한다. 이런 음악도 듣지 않고 비판을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인 까닭이다. 그렇다. 그저 비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유라의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는 당신을 위한 최상급의 대안이 되어줄 것이다. 비장의 카드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 일단 제목부터 흥미롭다. 만동과 공동 작업한 〈이런 분위기는 기회다〉에서도 유라는 수록곡 ‘지느러미’ ‘시간을 아우르는 공’ ‘축’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화제를 모은바 있다. 유라와 만동은 이 앨범에서 재즈의 자장 안에 있되 그것을 흥미롭게 변주하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일궈냈다.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에서도 전체적인 지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재즈적인 터치의 연주를 팔레트 삼은 유라의 보컬은 마치 허공 속을 떠도는 듯한 딕션을 통해 묘한 주술성을 획득한다. 어쩌면 사자후를 쨍쨍하게 울리거나 격정으로 들끓는 보컬의 극단에 서 있다고도 볼 만한 가창이다. 기실 이런 음반은 거의 대부분 첫 곡에서 진입 여부가 결정 나기 마련이다. ‘구운 듯한 얼굴이 너의 모티프’, 이 곡에 귀가 번쩍 뜨였다면, 반갑다. 당신은 이 앨범의 가치를 알아볼 미감을 갖고 있는 음악 팬이다.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겨도 좋다.

그렇다고 해서 난해하다는 평가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반문이 떠오른다. 이 정도가 이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분류되어야 한다면 “대체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오로지 직관적이고, 오래 곱씹지 않아도 소화 가능한 음악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때로 어떤 음악은, 어떤 텍스트는 조금 늦게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고는 한다. 삶에만 인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음악을 감상하는 데도 약간의 인내는 외려 미덕이 될 수 있다.기자명배순탁 (음악평론가)다른기사 보기 [email protected]#유라#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만동#이런 분위기는 기회다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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