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원 : '우리는 그를 몰랐고, 그 역시 우리를 몰랐다. 우리 사이엔 어떠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유대도 없었다. 우리가 공유하는 건 자유에 대한 사랑과 가자지구 공격에 함께 맞서려는 열망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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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관할하는 요르단강 서안의 예리코 시에지난 3월 10일 새로운 거리 이름이 탄생했다. 2월 25일 "제노사이드(대량학살)에 공범이 될 수 없다"면서 분신, 사망한 현역 미 공군 병사 애런 부시넬(25)의 이름을 딴 거리다. 압둘 카림 시드르 예리코 시장은 새 거리 표지판을 붙이면서 "자유 팔레스타인"을 외친 부시넬에게 각별한 감사의 뜻을 밝혔다. 영국 가디언이 현지 발로 전한 소식이다. 끝이 안 보이는 분쟁 속에 짧은 유대의 순간이었다.

서방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은 결코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4.13 이란의 이스라엘 본토 공격 뒤 세계 경제를 긴장케 했던 이스라엘의 재보복이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이스라엘 전시내각은 지난 19일 이란 중부 이스파한 인근의 공군기지에 소형 드론 공격을 감행하는 데 그쳤다. 이란 측에서는 북서부 이스파한 인근의 공군기지에서 3번의 폭발음이 들렸지만, 주변의 핵시설은 안전하다고 밝힌뒤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세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잘 된 것일까?

조 바이든의 미국이 이번에도 자유니, 민주주의니 온갖 고상한 말을 쏟아내면서 전쟁과 학살에 사용될 돈과 무기를 듬뿍 쥐여주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달랜 결과로 관측될 뿐이다. 이번에는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거들었다.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은 지난 20일 260억 달러(약 36조 원)의 이른바 이스라엘 안보 지원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지난 6개월 동안 보류했던 608억 달러(84조 원)의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과 대만 전쟁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81억 달러(약 11조 원)의 예산안도 한목에 의결했다. 우크라 예산안이 찬성 311표, 반대 112표였던 반면에 이스라엘 지원안은 찬성 366표, 반대 58표의 압도적인 다수로 통과시켰다. 바이든 행정부가 작년 10월 의회에 상정한 전쟁예산안은 당초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대만, 미국의 멕시코 국경 안보 등 4개를 한 바구니에 넣은 1050억 달러(145조 원) 규모의 단일 예산안이었다.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의 거듭된 통과 노력에도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 의원들의 '우크라 피로' 탓에 발목이 잡혔었다. 꽉 막힌 예산안이 통과된 것은 두 가지 변수 덕분이다.

우선 4.13 이란의 이스라엘 보복 공격과, 이에 따른 네타냐후 내각의 재보복 공격을 막을 수요가 작용했다. 민주, 공화당을 막론하고 이스라엘에 강한 지지를 보여 온 미국 의회가 하나로 뭉칠 계기를 마련해준 것. 다른 변수는 공화당의 '원외 사령탑' 격인 트럼프의 사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사실상 11월 대선 공화당 후보 자리를 거머쥔 트럼프는 강한 입김을 행사하고 있다. 단일 예산안을 쪼개서 낱개로 통과시킨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공화, 루이지애나)부터가 트럼프 사람이다.

트럼프는 작년 10월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이 해임된 뒤 공화당 내분으로 의장 후보들이 잇달아 낙마하는 혼란 속에서 4번째 의장 후보 존슨을 내놓고 지지했다.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적극 지지한 데다 이듬해 1.6 의사당 폭동 사건과 관련한 하원 논의 과정에도 변함없는 충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지난 12일에도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있는 자신의 별장 마러라고에 존슨을 불러들여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공약 점검 회의를 함께 했다. "재선되면 우크라 전쟁을 하루 만에 끝내겠다"고 다짐했던 트럼프는 노골적으로 우크라 예산 지원에 반대해 왔다. 하지만 최근 반우크라이나 전쟁 어조를 다소 완화함으로써 공화당 의원들이 친, 반으로 나뉘어 표결함에 따라 우크라 전쟁예산 지원의 통과가 가능했다는 해석(뉴욕타임스)이 나오는 배경이다. 존슨의 통솔력이 아니라, 트럼프의 든든한 배경이 의회 공화당을 움직인 것이다.

이스라엘 지원은 트럼프가 한목소리를 내 온 사안. 우크라 전쟁과 달리 "재선되면 가자지구 사태를 하루 만에 끝내겠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 있으니 가자전쟁을 끝내라"면서도 가자지구 공격을 문제 삼기보다 "폐허가 담긴 사진을 어떻게 이스라엘 군 당국이 배포할 수 있느냐"며 안타까움을 내비쳤을 뿐이다. 트럼프와 네타냐후는 인종주의와 종교적 정체성에 연연하는 극우 포퓰리즘과 반이란 정서에 의기투합하는 유형이기도 하다.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케미'가 존슨을 움직이고, 우크라와 이스라엘을 모두 지원하지 못해 몸이 달았던 바이든과 트럼프의 합작으로 전쟁예산의 통과가 가능했다. 4.13 이스라엘 밤하늘에 반짝였던 이란 드론과 미사일의 섬광 뒤에서 이뤄진 네타냐후 내각과 바이든 행정부의 '뒷거래'가 이스라엘의 제한된 재보복과 하원의 지원 예산 통과로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부시넬의 분신을 전후해 미국 전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던 반이스라엘 시위도 대세를 가르지는 못했다. 하버드와 컬럼비아대 등 주요 대학가에서는 여전히 시위가 계속되고 있지만, 미국 의회는 물론 미국민 다수가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국익에 중요한 전쟁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퓨리서치 센터의 2월16일 조사에서 우크라 전쟁 지원에 대한 찬반 여론은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 69% 대 81%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77% 대 76%로 정치적 성향과 무관했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치열한 유세전을 펼치는 가운데 '바이든-트럼프 연합'이 가능했던 까닭이다.

이란의 보복공격으로 세계 여론의 주의가 분산되는 동안에도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20일 현재 가자지구 보건당국에 따르면 3만 4000여 명이 숨지고, 7만 7000명이 다쳤다.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였다. 이스라엘 군 당국은 하마스 전사 1만 300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부시넬의 분신을 정신적인 문제 또는 무정부주의 신념 탓으로 돌리고 있다. 예리코의 ‘애런 부시넬 거리’ 주변에서도 이스라엘군의 '작전'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