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 총선이 막바지를 향해 가며 치열해지고 있다. 총선 결과에 따라 권력 지형이 요동칠 것이다. 그러면 또다시 증오와 술수가 난무하는 권력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늘 봐 오던 장면들이 되풀이될 뿐이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을 것이다. 권력의 이런 악순환을 두고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정 놀라운 것은, 이제는 ‘이런 게 정치’라는 식으로 모두가 체념한 듯 필요악 정도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정치 자체를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정치의 이상향을 다시 상기해 보자는 것이다.

재원 : 오래전부터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려하는 이야기가 없지 않았지만, 이 기회에, 그래도 역사의 진보를 믿고 더 나은 세상이 무엇인지를 예민하게 고민해 온 분들에게 우리의 진보 정치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길 제안하고 싶다. 어째서 진보 정권들은 천신만고 끝에 권력을 쟁취하고 나서는, 보수 진영에게 허망하게 권력을 내주고 마는지를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 무엇보다도 진보 정권이 힘겹게 앞으로 밀고 갔던 역사의 수레바퀴가 무참히 퇴행하고 마는 일이 왜 반복되는지를 처절하게 성찰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정책 집행이나 권력 운용의 효율성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위기와도 맞물리는 일이라고 본다.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

때마침 대표적 진보 학자인 김상봉 교수가 최근에 펴낸 『영성 없는 진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온뜰)이라는 책이 진보 진영에게 그러한 성찰과 숙의에 필요한 화두를 던져 주고 있다. 김상봉 교수는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나라 자체가 집단적 자살을 향해 치닫고 있다”라는 말로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기능 부전을 문제 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자살을 향하고 있다’라는 말은 공동체를 지탱해 주는 정의, 사랑, 신뢰 같은 유덕한 의미들이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모두가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의 처절한 생존 투쟁에만 매몰된 나머지 개인의 삶은 물론 공동체 사회를 지속해야 하는 정당성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OECD 국가 중 한국이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생률을 기록한 것은 이 사회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는 걸 압축해서 말해 주지 않는가.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위기는 인간의 사회적 삶의 붕괴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함께 살 수 없는 세상이 된다는 건 무엇을 말하겠는가? 이는 우리 모두 야수로 돌변한 세상이라는 것인데, 그 원인은 ‘무사유’에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형성하는 주체적인 힘이 고갈되면 동물적 수준의 생존 본능만이 꿈틀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정신적 빈곤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오로지 감각적 즐거움과 세속적 성공만을 지상 과제로 삼는 곳에서는 생각이 자라날 수 없다.

생각은 지금은 부재하는 미래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자라난다. 정치가 집합적 상상력을 발현하는 것이라고 할 때, 지금 우리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말은 상상력의 원천인 사유가 멈춘 상태에 있다는 것이고, 결국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함께 이상을 꿈꾸는 것은 “나와 이 세계가 결코 분리된 타자가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존재”라는 굳건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은 결국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인 ‘영성’의 부재에 있다.

저자가 정치의 장에서는 매우 낯선 개념인 ‘영성’을 끌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골이 깊은 데 있음을 가리키기 위함이며,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려면 제도 타령 따위의 합리적 이성을 뛰어넘는 ‘정신의 도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조선 왕조가 썩은 흙담처럼 무너져 가던 시절, 동학이라는 새로운 믿음의 언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절망적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믿음”이 아니겠는가라고.

진보 정치는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전체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먼저, 우리는 어느 때 나와 전체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가?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때이다. 고통이 때론 자기중심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때면 연민의 감정이 우러나와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애초부터 나와 타자의 만남은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을 전제로 한 감수성인 것이다. 이렇게 고통을 매개로 이루어진 나와 너의 만남은 그 고통을 함께 이겨내기 위한 ‘우리’ 즉 ‘전체’로 승화된다.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우리 역사가 수난 속에서도 고비 때마다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고 의미 있는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에 응답하고, 우리 모두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이 이 땅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까지 아파했던 것도, 윤상원이 끝까지 도청에 남아 죽음으로 말하려 했던 것도 “자기 개인의 가난과 고통이 아니라 세계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가 선을 향해 진보한다는 믿음이 없다면, 그리고 내가 그 전체 역사와 근원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과연 그런 자기희생이 가능하겠는가?”

이번 총선에서 화제의 인물은 단연 이재명 대표와 조국 대표이다. 두 사람에 관한 공통된 표상이 있다면, 그것은 ‘수난’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윤 정권 내내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들 정도의 모진 탄압과 수모를 겪어 왔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분노가 치미는데, 놀랍게도 두 사람은 억울함을 애걸하기는커녕 의연함을 잃지 않고 수모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만일 그러한 수난을 개인의 억울한 처지로만 여겼더라면 생존을 위해 비굴하게 처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대신한 공적 고통이라 생각했기에 당당하게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부당한 국가 폭력을 당하기만 하고 저항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했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정치 지도자로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마침 마련된 선거 무대에서 그들은 권력에 맞서 사자후를 유감없이 토해냈다. 그러자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의로운 고통에 응답하고 나선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19세기 이래 서양에서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하면 공정하게 개인의 이익을 쟁취하고 보호하느냐에 관심을 둔 “세속주의적” 권리 투쟁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면, 한국에서는 도리어 “종교적 신앙이 혁명적 진보 운동의 토양”이었던 게 우리의 “근현대 민중운동 역사의 특별한 개성”이라고 평가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진보 운동은 대체로 기독교라는 종교적 영성에 바탕을 두고 농민운동, 노동운동, 도시빈민운동 등 낮은 곳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헌신적으로 응답한 역사였다.

더욱이 “한국의 민중항쟁사는 한편에서는 대중의 정치적 참여에 의해 추동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내적 성숙을 통해 발전해 왔다.” 일제의 압제에 맞서 무력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계몽운동을 통해 민중의 정신적 자각을 도모하였다. 군사 독재 시절에도 폭압에 맞서서 학생운동과 재야 민주화운동 등 강경 투쟁을 하는 동시에 야학, 독서 모임, 양서 조합 운동 등으로 민주적 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정신적 고양을 함께 도모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 운동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 즉 인간에 대한 사랑 대신에 과학적 이론과 차가운 이성을 앞세워 세속적 권력 투쟁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 결과, “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 운동은 사랑은 증발하고 증오만 남은 속류들로 서서히 채워져 갔다.” 오늘날 아스팔트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촛불 집회와 태극기 시위의 아득한 거리”만큼이나 격렬한 대립은 고스란히 정치 무대로 투영되고 있다. 이제 정치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상대방을 멸절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전쟁”이 되어 버렸다.

사랑의 공동체를 향하여

이번 총선에서도 우리 정치의 그러한 민낯을 확인하게 된다. 여야 정치인들이 ‘전쟁’이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는 것처럼, 선거는 사생결단의 전쟁을 방불케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불의한 권력과 싸우다 보니 진보 진영에서는 절박한 심정에서 이기는 데만 급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심은 불의를 부정할 수는 있으나,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지는 못한다.” 총선 승리에만 만족하고 만다면, 진보가 애초에 꿈꾸었던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한때의 추억으로만 남고” 권력 쟁투의 악순환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두 개의 반(半)국가인 남한과 북한이 서로 적대 상태에서 체제의 우위를 위해 온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도 모자라, 다시 남한 사회 내부에서도 정당 간 진영 싸움이 그치지 않고, 또다시 진보 진영 내에서는 작은 차이를 둘러싸고 분열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사회는 이중 삼중으로 대립과 반목을 겹겹이 둘러치고 있으면서 서로를 배제하고 증오하는 데 역량을 낭비하고 있다. 그러니 언제 긴 안목으로 역사의 의미를 고민할 수 있고,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나라의 진로를 생각할 수 있고, 후속 세대의 지속 가능한 삶을 걱정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역사의 뜻 혹은 까닭은 이성을 뛰어넘는 ‘믿음’의 언어로만 알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전체와 이어져 있기에 너의 고통이 곧 나의 아픔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너의 존립을 위해 나의 자유를 주체적으로 제한할 수 있을 때 우리 모두인 전체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것을 신적 ‘사랑’의 현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해 낼 수 있는 정신적 고양이 시급하다. 총선 이후,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폭넓은 담론 형성을 기대해 본다.